일본어에서 한자어가 갖는 이런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cassette란 작은 보석상자를 의미하며, 내용물이 뭔지 모른느 사람들까지도 매혹하고 끌어당기는 물건이다. '사회'도, 그리고 '개인'도 일찍이 이런 '카세트 효과'를 발휘한 단어였으며, 그 효과는 정도의 차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도 여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어는 개념 지칭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번역체, 번역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개념이었다. 어순이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익숙지 않은 어미로 끝나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이 책을 발견한 후에 그제서야 모든 한자어 혹은 한글이 우리나라에 문자가 도입되면서 바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번역어는 다수 있을 터, 이 책에서 언급하는 번역어는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 그녀이다. 그 중 "사회"와 "개인" 그리고 "연애"는 해당 단어가 일본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이전에는 개념조차 없던 것이었다. 개념이 먼저 성립하고 단어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단어가 도입되어 그에 맞는 개념들을 사용자들이 논의를 거듭하여 끼워맞춰 가는 형식인 것이다. 이때 단어는, 스스로가 지칭해야 하는 어떠한 담론이나 의미의 규정에 있어서의 도구로써 발생하는 것보다 한 차원 앞서게 된다.
🔍 사용자들의 논의란,
1️⃣ 함께 쓰고, 쓴 것을 같이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미가 만들어져 가는 방식이다. /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암묵 중에 차차 서로 의미가 통하는 식이다. ▶ 민주적인 의미
2️⃣ 오로지 쓰기만 해서 보여주는 사람과 쓰지는 않고 쓴 것을 보기만 하는 사람 사이에서 의미가 성립되는 방식이다. ▶ 권력 지배적이고 계급적인 의미
야나부 아키라가 피력하는 카세트 효과cassette effect란?
공통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 내에서 새로운 단어, 즉 번역어가 자리잡기까지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심의를 거친다. 이때 새로운 단어를 최전선에서 맞닥뜨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어학,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외국어 사전에서 발견하는 정의는 모국에서 찾을 수 없는 개념이기에 이들은 불명확한 뜻에서 기인하는 "번역어의 남용"을 초래하게 된다.
번역어는 선진 문명을 배경으로 한 품위 있는 외래어이며, 비슷한 뜻의 일상어에 비해 어감이 좀 더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것처럼 막연히 느껴졌다.
이 당시 번역어들은 생소함으로 사람들을 매혹하였고 그로 인하여 단어 자체의 본의보다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는 집단이 강구하는 적절한 번역어로서 정착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번역어가 원어의 의미(번역어의 기원이 되는 선진 문명의 현상)를 고스란히 담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번역어가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일본적"으로 변질되거나 가공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완벽한 이해가 없어도 수용이 가능한가?
✏️ 번역어는 원래 하나의 언어 체계, 문화의 의미 체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단어를 그 체계에서 분리해 끄집어낸 것을 토대로 한다. 따라서 분리된 상태의 번역어만을 보고 본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 반드시 완벽한 이해가 이루어져야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단 받아들이고, 그런 다음에 차츰 그 뜻을 이해해가는 수용방식도 있다. 일본에서의 번역어는 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기능을 하는 말이다.
➖ 아름다움을 파멸적인 방식으로 소유하려고 했던 주인공의 이야기 <금각사>를 쓴 작가 미시마 유키오를 언급하며 "미"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번역어의 성립 방식으로 문학마저 분석한 것이다. 번역어의 역사는 시대의 역사, 그러니까 한 국가의 성립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도 막중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사회', '개인', '존재' 대목에서는 설명이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금각사>를 가져와 "미"를 설명하니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나아가 해당 작품이 시사하고자 하는 바가, 소설의 서사와 별개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의 "미"라는 단어와도 각별히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흥미로웠다.
마침내 나는 여자의 치맛자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 그때 금각사가 나타난 것이다. / 하숙집 딸은 작아지며 저 멀리로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다. / 빈틈없이 미에 둘러싸인 채로 어찌 인생을 향해 손을 뻗칠 수가 있겠는가. / 미라는 영원한 존재가 실로 우리 인생을 방해하고 삶을 해치는 것은 바로 이런 때다.
세부細部의 미는 그 자체가 불안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완전을 꿈꾸면서도 완결을 모르는 채로 그 다음의 미, 미지의 미로 끌려들어 갓따. 그리하여 예감은 예감으로 이어지고,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의 예감 하나하나가 이른바 금각의 주제를 이루었다.
🔐 가장 친숙한 단어들을 실례로 번역어의 성립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단어에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해준 책이다. 지금의 시대는 "선진 문명의 생소한 개념"이랄 것이 없는 시대인데, 일반적인 외래어가 아닌 그들의 개념이 하나의 모국어로 자리잡는 과정에 내가 참여할 기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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