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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옮기는 사람] 번역이라는 매개와 번역가라는 행위자 중 주체는 무엇인가?

읽은 것/책

by 척척박지 2021. 10. 1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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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라는 행위와 작업의 본질에 관하여 번역가의 입으로 듣는 변신

 번역이란 것이 ‘건너편 강변에 건네는 것’이라면 ‘전체’쯤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 봐 몹시 무서울 때가 있다.

✏️글자를 옮기는 사람 中。


덕질을 목적으로 자주적인 일본어 공부를 하다 보니 언어 자체에 흥미가 생겼다. 말하자면 성덕이라는 이야기이다. 일본이 알고 싶어서, 미디어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본의 문화(패션과 영화 등)로 발돋움한 관심이 어언 10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일본어를 통 모를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제 몸을 통과해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단어들로, 간접적인 경험을 했다. 그때도 마냥 행복했다.

 

일본어를 몸소 배우기 위해서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공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간 내 피부를 간질이고 귀를 거치고 뇌를 거쳐서 전신에 돌던 이미지들이 다시 새겨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원서로 읽고, 그가 사용한 문자 그대로를 번역을 거치지 않고서, 몸소 체득한 나만의 일본어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뭐가 그렇게 달랐을까? 그리고 난 어떻게 달라졌을까?

 

언어는 완벽할 수 있는 것인가?

 일어로 원활한 의사소통(일상 다반사를 넘어 학문적인 요소까지)이 가능하게 된 이후로, 일어와 한국어의 문법 체계와 단어 구성 방식에 대해 끝없이 호기심이 일었다. 고대에 만들어진 문법이나 단어들은 현대로 오면서 변천을 겪었고, 그 모태는 같을지언정 형태를 다르게 띄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대 국어, 일어는 마치 다른 차원의 언어와도 같았다. 언어의 기반이 한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한국어와 일본어는 대칭이 맞지 않는 데칼코마니처럼 느껴졌다. 분명 시작점은 같지만 끝으로 갈수록 변이하는 기이한 데칼코마니.

 

 큰 특징 중 하나인 한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두 언어를 비교하면 사실 완벽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개념이 된다. 각 국민의 생활 양식과 윤리 법칙에 따라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 다른 역사와 문화적인 맥락, 그리고 다른 소리로 현현하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한자어가 사실상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차이로 꼽을 수 있겠다.

 

 단어 요소와 문장의 구조에 완벽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주고 받는 의사소통에도 완벽성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간 엇나갈 것이고, 의중을 100% 확신할 수 없을 것이며, 청취하는 말과 발화하는 말 사이의 협곡은 심대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여 "소통(疎通/communication)"의 정의를 되묻는다면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는 끝없이 깊어진다.

 

외국어에서 모국어로의 번역, 모국어에서 외국어로의 번역. 과연 어느 한 방향은 쉬울까?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수천 개의 문장을 접하고 그 용례를 활용하면서 행한 것도 일종의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기설기 얽힌 문장들의 다발이 아닌 문법적인 퍼즐을 꿰기 위한 문장 단위의 번역이란 사실상 사전적 의미로서의 치환(*이를 소설 속에서는 "강을 건너는 일"이라고 한다)에 그치는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으로 이 소설에 나오는 번역가(책 한 권을 통째로 번역하는)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완벽할 수 없는 외국어를 완벽할 수 없는 모국어로 바꾼다는 것은 결국엔 행위의 주체자의 결단에 좌지우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설 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사유의 정체는 어느 한 쪽의 존재도 지우지 않는 결단의 연속이며, 이를 통해서 번역은 글만 변신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원본이 변신하는 움직임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번역의 주체에 스며들어 오작동을 일으킨다. '말과 말이 부딪히며 융합되지 못하고 단어로만 뚝뚝 끊기는 불협화음'에 소설 속 주인공의 육체가 반응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을 통하여 번역자와 글은 함께 숨쉬는 유기체로 변이하는 것이다.

 

끝으로.

(주인공이 작품 속에서 작업하는)번역문은 문장구조를 완성하지는 못하지만 용, 갑옷을 입은 게오르크, 잔혹하게 죽은 사람, 제물로 바쳐진 인간과 동물의 이미지가 어떤 긴박한 상황을 모자이크처럼 구성한다. 이러한 언어의 마찰 속에서 상상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바로 다와다 요코가 추구하는 번역이다.

✏️글자를 옮기는 사람-옮긴이의 말 中。

 

 국가별로 역사와 문화 배경이 다르듯, 개개인이 사용하는 단어의 역사와 문화도 같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통이 완벽할 수 없다고 말한 것. 소설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이 번역하는 작품 속 단어들이 규칙없이 열거된다. 이를 옮긴이는 '모자이크처럼 구성'된다고 하며, 이것이 바로 다와다 요코가 추구하는 번역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사소통에도 단서만이 나열된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따스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이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의사소통일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전문 번역가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 내 언어를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서 언어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거둘 수 없다. 때문인지 간혹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언어의 위대함에 손상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언어를 향한 기만이다. 언어는 내가 행하는대로, 발화하는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언어가 개인보다 작을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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